흐노니...2기 8화 흐노니 연재란

 

여름이었나? 언어도 통하지 않고 글씨도 읽을 수 없는 그런 낯선 타국으로 둘이 같이 여행을 와서 서툰 알파벳으로 시즈루와 내 이름을 적은 팻말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를 따라,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호텔에 무사히 도착해서 하룻밤을 묵고 여유로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가이드의 어설픈 영어에 의지해 도시를 조금은 바쁘게, 도시에게 나를 관광 시켜주는 것 같은 기분으로 관광하러 정신없이 돌아다녔던...시즈루와 나의 첫 여행. 난생 처음 하는 아주 평범한 여행이었다.


 그러던 마지막 날, 전날 늦게까지 놀아 피곤에 찌들어서 조금 늦잠을 자고 커튼 사이로 눈가에 따갑게 내리쬐는 햇빛에 못 이겨 눈을 떴을 때...시즈루가 방에, 욕실에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30분을 넘게 침대 맡에 앉아 어디 갔는지,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그보다 언제 나갔을 지를 생각했다. 마치 여행 가방 챙기듯 그렇게...내 정신과 이성을 챙겼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로도 1시간이 더 훌쩍 넘어서야 태연히 나타났던 시즈루는 전날 낮에 내가 무심코 먹고 싶다 했던 과일을 가지고 돌아왔더랬다. 말도 안 통하는 그 곳에서 그 날은 오후부터 만나기로 해 부재중이던 가이드 때문에 혼자 아무도 동행하지 않은 채로 물어물어 겨우 찾아서 가지고 왔다며 예쁘게 잘라 내게 내미는 통에...그저 그렇게 아무 말도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받아먹었었다.


“…혹시 지금도 그때와 같을까?”


 알 수 없었다. 그때처럼 태연한 얼굴로 돌아와 내가 전에 별 생각 없이 말했던 것을 기억해주고 그것을 이루어주기 위해 다녀왔노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지나치고 이기적인 나의 욕심인 것이다. 그녀의 배려와 끝없는 사랑에 무디고 무뎌져 문드러진...초라하고 흉측한 나의 이기심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래?]


 그래. 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난 그랬다. 대체 이 상황을 어쩌면 좋을까. 시즈루가 무슨 일이 있을 때 찾아보라던 전화번호부도 없어졌고 아는 번호라곤 맥의 핸드폰 번호.


[여기 안 왔어!! 곧 밤이 되는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이 멍청아, 당장 찾아와!!!!]


 그렇게 멕이 일본에 와서 배운 욕이란 욕을 다 듣고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무력감도 같이 시작점을 끊었다. 멕 이외에 내가 아는 시즈루의 지인...없다. 굳이 있다면 마이, 미코토? 스즈시로, 레이토…. …멍청하긴, 사실 그 녀석들과 시즈루가 제대로 연락을 하는 지도 잘 모르면서 이름들을 나열해서 뭣해. 그 날....그 더운 나라에서 나만 오싹한 식은땀이 났었던 것처럼 난 또 처량한 자세로 침대 맡에 앉아 멍하니 초점이 나간 눈으로 나무 바닥의 나이테 무늬를 덧그리고 있다.


“…….”


 초점을 흐리니 내 손가락도, 바닥도 자꾸 두 개로 보여 인상을 찌푸렸다. 그랬더니 꼭, 혼자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적적해 문득 멍하니 엘리베이터 안내문을 읽다가 그 문장이 얼마나 잘 짜여 있고 그 어떤 문장보다 유려한 문체이며 어쩌나 완벽한 정보를 주는 지에 대해 알아내고 그 안내문을 응용해서 시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 것 같았던 언젠가의 경험과 느낌이 비슷했다. 그런데 그 새로웠던 감각에 대해 누군가에게 얘기하기도 전에 잊어먹어 버렸을 때…….


 말로 다 못할 그 감정을 내가 또 까먹기 전에 누군가에게 말해서 하소연 하고픈데 나는 어느새 또 잊어먹어 버린다. 지금도 그것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안 이유는 지금도 그때처럼, 시즈루가 없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시즈루가 사라지고 나서 대학에 들어가 그저 날 다듬고 재련하느라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무심한 듯 살았던 그 나날들과 지금 내 기분이 너무도 맞아떨어져서이다.


뚜르르르르...,뚜르르르르......


* 여보세요? 나츠키? 별일이네, 이 시간에-. *

“……마이,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응?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시즈루가……, 또 사라졌다….”


 난 마치 부모가 추궁해서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있었던 일을 눈물과 같이 쏟아내는 어린아이처럼 울었고, 마이에게 있는 힘껏 머릿속을 정리하여 잘 설명하려 했으며 전화로 듣고 있는 마이를 위해 딸꾹질을 하지 않으려 연신 숨을 삼켰다. 그렇게 어려운 시간을 보낸 후에 이리 오겠다는 마이의 대답을 듣고 나서 또 다시 못내 아쉬운 눈물을 다 흘리며 바닥의 나이테 무늬를 그렸다. 그러면서 또 다시 하도 써서 기진맥진한 상태의 둔한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도 난…, 또 다시 버림받았다는 생각  밖엔 다른 뭔가 떠오르는 게 마땅찮았다.


 무조건 왜, 왜. 나의 뭐가 시즈루의 눈 밖에 나가게 된 계기가 됐는지, 그게 아니길 바라는 건 이제 너무 늦어 식어빠진 바람일 뿐인지...난 멍청하고 아둔한 것처럼, 혹은 정말 그런 사람이었는지 겁먹고 움츠러들어 지나온 과거만 들먹이며 후회하고 또 괴로워해 나약함의 뿌리를 건드렸다.


 그래, 그렇게 난 나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시즈루를 원망하며 책임을 떠넘길 채비를 하고 있었고 그 멍청하고 비열한 마음을 들킨 난, 나조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걸 차마 몰랐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 복잡한 마음을 정리해서 나의 집에 도착한 마이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마이는…, 대답 대신 엉망이 되어 있는 집안 여기저기를 어둡고 우울한 낯빛으로 치우고 다녔다. 그리고 얼추 치우고 나서는 버릇인 양 내가 더 익숙할 내 집에서 차를 끓여다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게 날 또 울게 했다.


 이 집에선 늘 있던 일인데, 단지 사람이 바뀌었다고 이렇게나 아프고 쓰라리다니. 좀 수그러들었나 싶었던 아픔은 사실 그랬던 게 아니라 기막힐 정도로 아파서 쥐가 났기 때문에 아픔 위에 몇 백 장의 종이를 대고 만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을 뿐이었다.


“나츠키.. 난,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고 생각해.”

“…….”

“…알고 보니 며칠 동안 회사에 출근하지 않으셨다면서? 시즈루씨...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정말 모르겠어?”

“…….”

“시즈루씨의 친구 분이라던 그 멕이라는 사람도 어디 계신지 모른다고 하면,”

“…나도……, 알고 있어.....”

“...응.....?”

“뭔지 잘 몰라도...내가 잘못한 거라는 거...말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렇게 떠보는 말 안 해도 돼.”

“……정말 못 말리겠어.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 대체 뭘 했기에 늘 웃고 계시던 시즈루씨가 사라지신 건데...?”

“…시즈루도 희로애락이 있어...”

“말 돌리지 말고-, 대체 뭐했냐고.”

“…그러니까,”





 나중에 엇갈리는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차근차근히, 마이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전화로 했던 것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시즈루가 몇 주 전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던 것부터 그걸 듣고 패닉을 일으킨 내가 방황하다 사고를 당해 병실에 몸져눕게 됐다는 것과 고교시절 부득이 안면이 있던 mr. 스미스가 tv뉴스에 나와 발표한 논문 및 자료를 보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생겨 그를 찾아갔다는 것...


“잠깐, 그게 정말이야?”

“……그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는...그게 가능하다는 걸 나에게 입증해줬고 난 그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

“……아니, 그게 아니라...너 전에 그 사람에 대해 내게 얘기해준 적 있잖아. 그 사람....너의, 그...”

“…잊은 건 아니야. 그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날 송두리 쥐고 흔들어놓은 남자...이 가슴의 분노를 다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를 미워한다, 증오한다. 그 후로 아무리 내리는 비를 맞고 또 맞아도 그 날 밤의 그 비보다 더 차갑고 머리를 뚫고 가슴도 뚫고 나와 내 온몸을 꿰뚫는 비를 찾을 순 없었어. 맑은 구름이 내려주는 따듯한 여우비도, 여름 날 장대 같은 소나기도, 한 겨울의 눈이 되기 직전의 가랑비도....그 어느 것도 그 비와 닮은  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정도로....그 어느 것도 만족할 수 없었던 것만큼 그보다 훨씬 더 그를 증오해.


“…그런데 말이야...마이. 난……, 그 감정들을 떨쳐버릴 정도로..시즈루가 소중해.”

“나츠키…, 난...네가 행복하길 바라고 늘.....내가 바라던 건 그거였고 지금도 그래...”

“.....고마워..”


 난 뭔가 몸 안에서부터 떨림이 느껴져 말끝을 흐렸다. 딱히 감정이 복받치거나 가슴께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난 또 다시 후두둑, 후두둑 눈물을 쏟아내며 마이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에도 두 팔을 두르고 꼬옥 끌어안았다. 시즈루가 생각났다. 하지만 난 시즈루에게 그런 식으로 매달려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게...왜 또 그리 날 서럽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 사실...원래대로라면 지금 시즈루가 내 이 팔에 안겨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줬어야 했는데...그녀가 사라져버린 게, 갑자기 원래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 게…, 날 미치게 한다. 마치 그녀가 원래부터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었고, 난 미쳐서 환각에 빠져 거의 2년 가까이를 혼자 시즈루가 돌아왔다고, 시즈루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고 생쇼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 제발. 그런 무서운 생각은 하지도 마......


“나츠키…, 시즈루씨를 찾아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시즈루씨는 아마 그, 멕 씨의 집에 계실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시즈루씨도 너처럼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니까.”

“……알았어.”


 아직 팔의 기브스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마이가 내가 말하는 데로 대신 운전을 해서 멕의 집으로 날 데려다줬다. 마이는 멕과는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같이 집 앞에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고 말해서 난  알고 있다고,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준 후에 염려하는 마이를 배웅하고 멕의 맨션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그러다 의기소침하고 자신감 없는 내 모습이 비춰지는 거울을 보고 기시감을 느꼈다.


 비친 내 모습이 아주 오래전 나 홀로 뭔가에 홀린 듯 둔감한 감각을 느끼며 살고 있던 때의 나의 모습과 닮아보였기 때문에... 


“…그땐......너무 괴로웠어. 희로애락도 오감도 엉망에 허점투성이였었지. 늘…, 네가 돌아오는 것을 내심 기대하면서 또 상처를 받았어…, 시즈루.”


 너에게 그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네가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한 거라고 생각하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가 내 기분을 알기를 원해.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다. 아니, 그래야만 해.


딩-동-…. 딩-동-….


* 누구세요. *

“맨션이니까 카메라 있잖아.”

* 암호를 대시오-. *

“어이.”

* 저는 아무나 안 들입니다, 여긴 제 소중한 집이니까요-. *

“…너의 [여동생]을 데리러 왔다.”

* ……. *


 도어 록이 해제된 후, 멕이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약 한달 쯤 전에 봤던 기억보다…무척 수척한 모습에 조금 놀랐다. 소매를 말아 걷어붙인 흰 셔츠는 깃이나 끝자락이 조금 구겨져있었고 짧은 커트 머리는 정리 하지 않은 채 조금 자란 상태로 아무렇게나. 제대로 빗어지지도 않은 상태, 그리고 시즈루처럼 서류나 책을 읽을 때 쓰는 안경은 콧등에 자국이 날 정도로 오랫동안 멕의 콧등에 얹어져 있었던 것 같아 보였다.

     

“……그녀는 널 만날 수 없을 거야.”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쇳소리가 나는 조금 갈라지고 매 마른 목소리…, 이걸로 보아 그녀는 분명 물도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누군가와 얘기도 잘 안하면서 무언가에 굉장히 열중해있었으리라. 아마도 시즈루가 사라지고 제대로 처리된 일이 없어서 시즈루의 몫까지 하느라 그랬을 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건...조금 이상하다. 시즈루가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모습의 멕이라니.  


“내가 그녀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 여러 가지 추측해봤지만 그래도…, 적어도 집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나와 함께 했던 거의 대부분을 다 없애버릴 정도까지의 일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이 답답하고 초라해지는 기분을 해결하고 싶다, 그래서 온 거야. 화해…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게 싫다면 이유를 듣고 해명할 기회라도 줘, 부탁이다!!”

“…그걸 왜 나에게 부탁하는 거야?”

“시즈루가…! 여기 있잖아……!!”

“없어.”

“…거짓말 하지 마.”

“지금 떠보는 거지?”

“아니다. 난…, 여기 아니면 시즈루가 갈 곳은 없다고 생각해.”

“교토에 집이 있는데?”

“몸이 아닌 마음에 대해서인 거야……!”

“…그렇다면 더더욱 아니야.”

“어째서…?!”

“…하아-…. Oh, God.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

“뭘…!”

“…내가 여기에 시즈루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녀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도와줄 마음이 없어서야.”

“네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했다고…?”

“그래, 그것 때문에 난 화나 있다, 무지. 네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시즈루는 정말 여기에 없어……?”

“그래. 근데 나 궁금한 것이 있어.”

“…….”

“…넌 왜 네가 그녀에게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 얘기하자면 길어. 결론은, 내가 시즈루를 너무 내버려뒀고 그게 시즈루에게 심한 악영향을 끼쳤어...난 그것에 대해 면목은 없지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즈루가 우리의 집을 그런 식으로 망쳐놓고 사라져버릴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혹시 우리 사이에 뭔가 어긋난 것이 있다면 난 그걸 해결하고 다시 시즈루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난 시즈루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어. 여기 있을 줄 알고 왔는데…. 없다니, 대체 어디 가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전에 시즈루에게서 들은 적 있어. 시즈루가 네게 아이를 원했다고?”

“…그래……. 그 얘길 처음 들었을 때 정말 곤혹스러웠다. 만들지도 못하는 아이를 만들어서 달라니, 대체 그게 무슨 경우인가 싶었다.”

“…흠......”

“그래서...난 조금 방황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몰라 혼자만의 시간을 자주 만들게 되었어. 시즈루를 보는 게...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난 많은 것을 알아봤었지만 그 어느 것도 내가 바라는 답이 되진 못했어.”


 외국의 사례를 보면 대부분의 여성 커플은 정자은행에서 남성의 유전자적, 신체적 조건을 보고 마음에 드는 남성을 선택해 최소 한 번에서 많게는 수정이 성공할 때까지 시도를 한다고 한다. 마치 바늘이 없는 주사기처럼 생긴 것에 정자를 담아 가장 적임기간에 사용한다고…,


 시즈루와 내가 사랑을 나누면서...시즈루의 몸 안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유전자를 주입해야한다니……. 그걸 생각하니 거북하고 기분 나빴다. 그리고 그것 외엔 다른 뾰족한 수를 찾을 수 없어 내내 그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바보처럼 시즈루를 홀로 두고 집을 나서서 방황을 했었지……. 


“…난 시즈루와 얘기하고 싶다.”

“그건 그녀와 직접 얘기해.”

“불러줘.”

“네가 교토로 가서 직접 말해.”

“…시즈루가 거기로 갔을 리 없잖아...! 회사 일과 나와의 일을 내버려두고?!”

“그래, 그래서 난 더 화나 있지.”

“…정말이야.......?”

“그래, 그녀는 패배자야. 너에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또 다시 도망을 갔지.”

“시즈루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게 뭐야...”

“…내가 얘기해도 되는 거라면 얘기하고 시즈루를 변호해서 널 시즈루에게 보내려할 테잖아?”

“네가 시즈루를 변호하든 말든 상관없다. 사실을 알고 싶어.”

“그녀에게 가. 그리고 그녀에게서 들어. 너희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

“멕…!”

“그만 날 내버려둬!!!!”

“…대체 시즈루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넌 나에게 거짓말 했어!! 어젯밤에 시즈루가 없어졌다고 너에게 전화했을 때 넌 나에게 시즈루를 찾아오라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와서 나에게 너희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다고?!!”

“그야 오늘 새벽 시즈루가 날 찾아와 나와의 약속을 저버렸으니까!!!!!!!”

“뭐....?!”

“망할, 나에게 거짓말했어!! 그리곤 그 어이없는 얘길 하며 날 찾아왔다고!!!!”

“제대로 얘기해봐!!”

 

 나츠키의 날카로운 고함에 울컥한 멕이 순간 주먹을 쥐었지만 이미 망신창이의 몰골을 해가지고 진통제나 맞을 나츠키의 상태를 생각하니 화내는 것조차 웃기다고 생각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맨션으로 들어가며 나츠키에게 손짓했다.


“...밖에 계속 세워두다니 내가 실례했다. 들어와, 차라도 마시자.”

“고맙다.”


 맨션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서류의 산더미들이 이곳저곳에 쌓여있었다. 삭막하고 건조한 환경에서도 해야만 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들일 테다. 어쩌다가 일을 집에 가져와서 하게 되다가, 결국엔 회사도 못나가면서까지 집에서 일하게 됐는지...


“…정말 시즈루는 여기에 없는 거군.”

“그래,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지.”

“밥은 제대로 먹었어?”

“그랬을까?”

“…뭐라도 시킬까.”

“절대 내가 요리할까라는 말은 못하는군.”

“아게하가 시즈루랑 비슷해. 그러고 넌 나랑 비슷하지, 멕.”

“...그래, 인정하지.”


 그렇게 실없던 대화와 식사를 하며 몇 번이나 졸라댄 끝에 멕이 차근차근히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멕은 아까 나츠키에게 했던 것처럼 문을 열고 처음 시즈루의 얼굴을 봤을 때의 일을 얘기해줬는데 멕이 왜 나츠키를 만나자마자 한숨을 쉬며 어두운 얼굴로 쳐다봤는지를 알게 한 내용이었다.







“시즈루?!! 너 대체 어디 가 있었던 거야?!”

“설명하자면...힘드네요.”

“얘기해! 뭐든지 다!!”

“…….”

“내가 며칠 동안 네 핸드폰에 연락하고 너네 집까지 찾아갔었는데 집엔 아무도 없고 넌 연락도 안 되서 날 미치게 만들었어! 대체 어쩌자고 그런 식으로 너의 일과 친구들을 내버려둔 거야?! 적어도 미리 나에게 연락했으면 이렇게 화내는 일은 없었을 거잖아?”

“미안해요...”

“미안하다면 다야?! 네가,”

“멕....”


 ‘나 화났어’ 라며 몸짓 발짓 다 동원해서 표현하고 있는 멕의 팔을 살짝 대고 있는 듯이 붙잡은 시즈루의 손이 이상했다. 붙잡기 망설여졌지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붙잡은 것 같은 소극적인 행동.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제대로 시즈루의 얼굴을 쳐다본 멕은 시즈루가 아까부터 죄 지은 것 마냥 자신과 눈을 못 마주치는 걸 눈치 챘다.

 

“…뭐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멕, 저 당신에게 중요한 할 얘기가 있어요.”

“……뭐야, 너 왜 그런 말투를 써?”

“저 당신과 약속한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걸 어겼어요...”

“뭘 말하는 거지?”

“약 3년쯤 전에 한 약속이었어요...미안해요.”

“…….”

“멕...?”

“…….”


 멕은 조금 놀란 얼굴을 한 채로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오려다가 멍한 표정으로 잠깐 고민에 빠졌다. 시즈루는 고개를 숙이고 멕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마주 잡은 양손을 비비적거리며 만질 뿐이다.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어두운 표정과 행동. 잠깐 시즈루가 말한 3년 전 쯤을 기억해내려 했지만 시즈루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나도 많아 뭔지 감도 안 잡힌다. 


“…심각한 얘기인가? 그렇지?”

“네.”

“좋아. 생각해봐도 기억 안 나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줘.”

“정말 그걸 바래요...?”

“당연하지, 그래서 부탁하고 있는 거잖아?”

“……. 지금 관계와 우리 둘이 처음 시작되려던 관계는 달랐죠..그것에 대한 약속을 말하는 거예요.”

“……. 3년 전 겨울?”

“……네.”


 기억났다, 3년 전 초겨울 쯤 되었던 때.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인사치례로 나갔던 모임에서 시즈루와 만났고 어느 새 시즈루를 만나기 위해 그 모임에 계속 출석하다가, 결국엔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져 그 모임에 안 나가게 되었을 무렵. 난 시즈루에게 일본어를 가르쳐달라며 계속 그녀가 살고 있던 아파트로 찾아갔었고 1주일에 3일 정도는 시즈루의 아파트에서 자고 가기도 했었다. 허나 난 늘 시즈루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한 달이 넘도록 시즈루의 손을 잡는다거나하는 일은 하지 않았었다. 그건 시즈루와 나의 문화가 달라 그런 행동이 우리 사이에 좋지 못한 결과를 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돌연, 시즈루가 그 붉은 눈으로 내 마음을 꿰뚫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그건 내가 용기를 내는데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사치례로 나갔었던 모임에 다시 둘이 함께 나가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또 생각보다 너무 많은 술을 마신 그 날에 말이다.


“아~정말 대단했어!”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 진 모르겠지만~~? 재밌었네요? 후후후~~~”

“흐하하하, 너 취한 거야? 본 적 없어~”

“하하하, 저도 본 적 없네요~~”

“뭐라는 거야, 바보야? 하하하하, 시즈루 아무튼 그래~~”

“아~~~, 조금 어지럽네요? 후후후, 아-? 여기 우리 집이네요?”

“무슨 말이야, 네가 이리 오자고 했잖아? 가깝다고~?”

“그랬어요? 아하하, 왜 그랬지~~?”


 누가 먼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고 어떻게 말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들어온 시즈루의 집. 시즈루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조금 거북하고 어지러웠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었던 것 때문인지 여러 가지 냄새가 몸에 밴 게 기분 나빠 샤워를 먼저 하려고 생각해서 집으로 오자고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멕은 같이 술을 많이 마시고나서 집에 가기엔 너무 멀고 편안한 곳에 앉아 술기운을 달래고 싶어서 왔지만...조금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즈루, 뭐해?”

“아, 샤워하고 싶어서요~~~. 근데 옷이...? 이상하네요?”

“하하하하, 그래?! 난 너 지금 굉장히 웃긴 짓 하려는 것 같았는데??”

“아우~~, 이상하네요-?”


 시즈루는 지금 두꺼운 하얀 코트에 붉은색 카디건,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옷들의 색이 점점 섞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지금 시즈루가 순서대로 옷을 벗는 게 아니라 벗고 싶은 것 먼저 벗으려고 카디건의 단추를 끄르고 한손으론 스타킹을 벗으려고 낑낑대며 욕실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멕은 저러다 넘어지겠네~하며 시즈루가 코트 벗는 걸 도와주려고 다가가 손을 뻗었다.


“하하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벗는 거야? 다 꼬였잖아~~?”

“아아~, 그렇게 당기지 말아요~~? 어지러-”

“하지만-, 어라라??”


시즈루의 덜 풀린 코트의 단추를 다 풀어서 당기려고 했는데 너무 서툴고 세게 당기는 바람에 투둑, 하고 옷이랑 단추가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멕이 놀라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옷을 정리해주려고 했는데 시즈루는 벗겨주려는 줄 알고 코트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비적거린다. 그렇게 생각보다 무거웠던 코트가 시즈루가 걸치고 있던 카디건과 같이 땅에 떨어져버렸다.


“…아, 저……. 시즈루?”

“으응~?”

“……옷이.”

“…아.”


 아까 ‘투둑’ 소리는 시즈루의 코트에서 난 소리가 아니라 시즈루의 하얀 원피스의 어깨부분에서 나는 소리였었나 보다. 그래서 시즈루가 흘러내리는 원피스의 매무새를 단정히 하려고 옷을 끌어당겨도 자꾸 흘러내려서 그냥 멋쩍게 웃으면서 대충 옷을 치켜 올리고 욕실로 향한다.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며 찢어진 옷을 아무렇게나 입은 시즈루의 모습을 뒷모습만 보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뭔가 말을 걸지도 말고,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지도 말고 그대로....오우,


쿵!


“아~, 미안해요-? 멕이 있던 자리가 갈아입을 옷이-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음...알죠? 후후, 그러니까 잠깐 옆으로-....에?”

“네가 자초한 거야.”


 생각보다 놀라울 일이 있었다. 시즈루는 생각보다 몸집이 더 아담했고 훨씬 더 붉어지는 온몸의 색은 하얀 얼굴까지 물들여 아주 예쁜 색깔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점점 시즈루에게 다가설 때마다 시즈루는 나에게 억지로라도 장난을 걸며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 했다. 키득키득 웃으며 이런 장난은 재미없다고, 좀 더 그럴싸한 건 없냐고 내 어깨를 툭툭 쳤지만 시즈루는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이가 아니었기에 곧 낮은 목소리로 ‘낭패다’라며 내 시선을 피하고 곤란한 듯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전에 이런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 걸까.

 시즈루는 애써 태연한 듯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건 입술만, 술기운 탓이기도 한지 눈은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본다. 그리고 점점 시즈루의 숨소리는 잦아들고 내 어깨를 밀어내듯 대고 있던 꼭 쥔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싫은 걸까…, 아님 이런 상황이 생소해서 놀란 걸까.

    

“시즈루?”

“…멕~……. 저기…, 이 자세 불편하지 않아요?”


 눈이 마주쳤다. 용기를 내어 붉어진 얼굴을 든 시즈루가 싱긋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더니 ‘잠깐만 나와 봐요’하며 강경하게 날 밀어내려 했다. 붉고 붉은 눈동자, 검은 동공마저도 붉은 것 같은 그 색깔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그래서 시즈루의 볼에 손을 대었고 시즈루가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등 바로 뒤에가 하얀 벽이었다. 어째서일까. 시즈루의 볼이 점점 뜨겁게 느껴졌고 내 손도 뜨거운 것 같았다.

 시즈루의 숨결도 뜨겁고 그걸 알만큼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는 내 얼굴도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것은 이제는 나와 마주쳐진 시즈루의 붉은 눈동자이고 그 다음은 긴장의 연속을 참지 못하고 마르는 입술을 다시고 깨물고 핥았었던 시즈루의 입술에 닿은...내 입술의 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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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touch 2010/03/28 21:37 # 답글

    흐어!
    드디어 다시 연재를 시작하셨군요!
    기다리느라 목빠지는 줄 알았네요 ㅋ
    역시 다시시작해도 재밌는거 가타요
  • LIsKira 2010/11/25 01:06 # 삭제 답글

    ㅇㅅㅇ~ 미역머리님~
    이제서야 보고 갑니다 ㅠㅠ ~
    다음편도 여전히 기대 만빵 ㅎㅎ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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