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록….”
“아…, 저. 식사 감사했습니다...”
“……후후.”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맑고 고요한 밤. 대나무 잎 사이사이로 바람이 타고 날아 들어와 다카하시씨의 앞 머리칼이 일렁였다. 그리고 차를 마시며 밖을 바라보시던 다카하시씨가 말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무슨, 흡사 며칠 굶은 것 같더라고요?”
“윽.”
역시 아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었지만 이 분 하는 행동이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비록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말 그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는 한결같은 다카하시씨의 인상이다. 밝고 맑은 피부에 미소를 많이 지으셨는지 긍정적인 면으로 진 점잖은 주름, 짙은 검은색 청포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짙은...오렌지 색깔의 눈. 어쩐지 목소리도 그렇긴 한데 생김새도 어딘가 시즈루와 많이 닮은 듯, 그런 느낌이 든다. 기모노를 입고 계셔서인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익숙한 느낌이 들어 친근함을 느끼지만, 이 사람은 나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말에 가시가 숨어 있으니까.
“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맛있는 식사였기에 그랬습니다.”
“왜죠? 그 전엔 어떤 것들로 식사를 하였기에?”
“에-, 일단 병원 식단을 먹었었고…. 그 뒤로는 제대로 된 건 별로…못 먹었어요.”
“하아, 그렇다니까요? 요즘 사람들은 식사에 신경 쓰지 않고 빠르고 간단한 것만을 찾아요. 그건 정말 잘못된 습관이에요.”
“예…. 그렇죠. 저도 시즈루와 지내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 아이는 말이죠? 차 한 잔도 정성을 다해 시간을 들여 우려내는 깊은 맛이 있는 학생이었어요. 늘 자랑스럽게 생각한답니다.”
“…학생이요?”
“그래요. 시즈루는 6살부터 고교 무렵까지 저에게 다도나 전통예술을 배웠었지요. 아장아장 걷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봐왔답니다. 참으로 귀여운 아이였어요~.”
“하아-, 그러시군요. 그럼 선생님이십니까?”
“네, 지금은 학생들에게 샤미센 연주를 가르치고 있어요.”
“아-. 그럼 오늘은 어쩐 일로…. 시즈루에게 샤미센을 가르쳐주시려고 시즈루의 집에 가신 겁니까?”
“아니, 반대예요. 시즈루에게 부탁이 있어서 갔지요.”
“어떤…?”
“으응, 개인적인 거랍니다.”
“흐음-….”
다카하시씨가 싱긋 웃으면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저 얼굴은 뭔가 께름칙한 게 있다는 얘기인데…, 뭘까 그게. 어쩐지 알아봐야할 것 같다. 역시 이 사람 말대로 내일 같이 시즈루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겠어.
“있잖아요?”
“예?”
“술 한 잔 하지 않을래요?”
“예?”
“좋은 정종이 있는데.”
“아…. 하긴 아직 8시니까요.”
“그럼 따뜻한 것, 차가운 것?”
“둘 다 되나요?”
“아니, 사실 난 차가운 게 더 좋아요~.”
“하하, 그런가요? 시즈루도 차가운 걸..좋아하는데.”
“……당신은 계속 시즈루 얘기 밖에 할 수 없네요.”
“…그야 저와 당신의 공통점이 시즈루이니까요.”
“그렇-군요.”
곧이어 몇 분 후에 차가운 정종과 잔 둘, 간단한 안주거리를 들고 온 다카하시씨가 내 앞에 앉아서 정종을 따라주려 하시기에 얼른 잔을 받아들었다. 따라주시는 곡주의 향기가 알싸하면서도 묵직했고 향기의 끝부분에서 아주 살짝 꽃향기도 나서 흥겨운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정종은 정말 오랜만이고 잘은 몰라도 정종이 꽤 고급인 것 같아서 더 기분이 좋았다. 한 병 정도라면 딱 좋은 수준이지.
“하하하, 이거 정말 맛있네요~.”
“그렇지요? 애주가이신 아주 좋은 지인께서 선물해주신 거지요, 혼자서는 마시기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는데 말이죠? 시즈루가 왔다기에 같이 마시길 기대했었는데, 좀체 자기 방에서 나와 주질 않아서 말이에요. 그런데 모처럼 이런 손님이 와주셨으니 내와 봤지요.”
“하하-, 근데 시즈루는 왜 나오지 않는 거죠?”
“쉬고 싶다더군요.”
“…….”
쉬고 싶다라니…, 다시 잔을 받아들면서 잠시 옆을 흘겨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도 만나고 있지 않는 걸까, 시즈루는. 그럼 혼자 방 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멕이 말해준 그 얘기를 생각해보자면 시즈루는…,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닐 거야.
“자, 마셔요.”
“예.”
“…시즈루는 말이지요?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
“티를 잘 안 내는 아이에요.”
“아…, 예.”
“저와 시즈루의 아버님이 시즈루와 당신 이야기를 알게 된 건 얼마 안 되었어요.”
“정말요?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틀 전.”
“예?!!”
“농담이에요, 사실 두 달.”
“예?!!!”
“아라, 그 마저도 놀라워요?”
“아니, 그럴‥리가!! 전 초기 때부터 시즈루에게 얘기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알아서 잘 하고 있다고 했겠죠. 어쩌겠어요, 그 아이는 원래 그 모양인걸.”
“예…?! 하지만 시즈루는 뭐든지 알아서 잘 한단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건 절대 하지 않지요, 아버지를 닮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예엡. 미리 알아보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죄송합니다. 그저 시즈루에게 맡기고만 있었네요….”
“왜 사과를 하지요?”
“그야 시즈루가 잘못했으니 대신해서….”
“그러니까 그걸 시즈루를 당신보다 훨씬 오랫동안 봐온 나에게?”
“…!”
두 달이라. 그럼 이 분은 날 알게 된지 두 달이고 자세히 얘기 들을 일도 없었을 테니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리 달갑지 않을 상황이기에 나에게 더 적대감이 있으시겠지. 그렇다면 처음 뵈었을 때부터의 그 위화감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그렇단 말이지.
“…예, 시즈루는 제 사람이니까요.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정자세로 고쳐 앉아 다카하시씨에게 머리 숙여 인사 드렸다. 그리고 다카하시씨가 뭐라고 말할 사이 없게 술병을 받아들어 잔에 정성스레 따라드렸다. 그랬더니 씨익 웃으시며 시원하게 잔을 비우시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듯이 말을 꺼내신다.
“쿠가 나츠키라고 했지요? 시즈루의 고교동창이고-, 지금은 같이 살며 지낸다는.”
“예, 사실은 후배지만요. 그리고 지금은 연인입니다.”
“……시즈루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무슨 의미십니까.”
“시즈루가 교토로 갑자기 돌아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있는 거예요.”
“…시즈루에게 직접 듣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유를 몰라요?”
“아뇨, 알지만 시즈루가 말해야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심호흡을 해도…, 입술이 다물어진 채로 양쪽으로 당겨지고 턱에 주름이 생기면서, 자연스레 미간에도 주름이 지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리고 다카하시씨에게서 시선을 돌린 내 눈가도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멕이 해준 얘기를 듣고서 도저히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 이렇게 한달음에 왔는데. 시즈루는 오늘 나를 만나줄 생각이 없다니. 점점 감정이 깊어져 콧잔등에도 주름이 생길 것 같지만 이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피곤하네요~.”
“예?”
“저는 이만 자러가야겠어요. 피곤합니다.”
“아! 예,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네, 난 이제 자러갈 테니 쿠가씨도 어서 잠자리에 드세요, 내일 6시에 후지노가에 방문할 테니까요.”
“6…? 저녁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늦게는 실례지요, 아침이에요.”
“예? 새벽에??”
“도시에서는 그런가보지요? 그럼 이거-. 술병은 두고 갈까요? 마저 반주 하시겠어요?”
“아-, 아닙니다. 이제 충분하니까요.”
“그럼 물러갈 테니 어서 주무십시오~.”
“예…, 저...다카하시씨. 감사합니다.”
“감사인사는 많이 할수록 그 가치가 수그러드는 것이지요. 어서 주무세요?”
“아…,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다카하시씨.”
상을 들고 가시며 어떻게 한 건진 잘 모르겠지만 능숙하게 문도 잘 닫고 가시는 다카하시씨의 뒷모습을 보다 문득 집에서의 일상이 스쳐지나갔다. 그 날은 내가 운전하는 날이었지. 늘 같이 퇴근하기에 내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의 대화는 늘 저녁 뭐 먹을까 집에 가서 뭘 할까, 식사하고 난 후에 느긋하게 목욕을 할까…, 그런 얘기를 하면서 말이야…….
*“난 라멘 먹고 싶었는데.”
“외식은 몸에 안 좋아요, 오늘은 꼭 해먹을 거예요.”
“하지만 난 요리 잘 못하고 시즈루가 대부분 하니까 미안하잖아. 사먹으면 설거지 안 해도 되니까 편하고.”
“하지만 밖에서 저녁 먹으면 짜게 먹고, 먹고 나면 긴장이 풀리니까 운전하기도 힘들잖아요, 집중해야 하는데.”
“오늘은 내가 운전하는 날이니까 괜찮다, 시즈루처럼 졸음운전 안 해.”
“아라~? 저 그런 적 없어요?”
“있다. 분명 초점이 없었어.”
“아니라고요.”
“아~! 그냥 사 먹자!! 나 다시 시내로 갈 거다!”
“나츠키, 이미 도로에 들어섰어요. 얌전히 집에 갑시다.”
“유턴 하면 되잖아, 유턴!”
“안·돼·요.”
“시즈루~~!”*
그땐 일도 바쁘고 시즈루가 힘겨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일부러 먹고 싶지 않아도 외식을 하자고 했었지. 하지만 속도 더부룩해지고 컨디션도 안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이니까 결국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사오거나 밥 정도는 내가 잠들기 전에 지어놓고 자고 시즈루가 아침에 후딱 된장국을 끓여 간단하게 식사하고 출근하고…, 그런 평일의 지겨운 일상이 끝나고 나면 주말에는 장을 봐와서 같이 먹고 싶은 거나 평소에 먹을 수 없는 요리를 만들어 먹고, 둘이 살기엔 쓸데없이 큰 집의 청소를 분담해서 하고…, 그러다 저녁이 되면 점심에 먹고 남은 것으로 때우고 나서 그리도 좋아서 녹음이 푸르른 장소로 이사 왔으니 같이 산책도 하고 다시 집에 돌아와 보고 싶었던 DVD를 자정이 넘도록 보고…. 그러다 기절하듯이 잠들고….
“흐윽…! 시..즈루……. 이 바보갉, 바보야. 이…멍청이.....!”
왜…, 대체 왜 그런 거야. 내가 너에게 뭘 잘못했기에 그런 거야, 내가 너에게 그렇게 못 미더웠니. 날 믿지 못했던 거야? 내가 널 이해해줄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 거니…. 난 대체 너에게 어떻게 해줬어야하는 거야. 말해줘, 대체 나에게 왜 그랬어? 시즈루, 시즈루…!
“말해봐…! 날 보고 얘기해, 이 멍청아!! 왜…, 왜…!! 윽....흐윽…! 바..보…….”
이불 위에 쭈그려 앉아 무릎을 안고 내 팔을 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너무나도 마음이 쓰라리고 아파서 주체할 수 없이 숨이 가빠졌다. 나는 지금 너무나도 외롭고 또 외로워서 내가 날 붙잡아주고 싶었나봐. 순간 잠든 것 같아 깜짝 놀라서 깨보니 아기처럼 옆으로 웅크려 누워서 내가 내 다리를 안아주고 있었으니까. 혼자 잠드는 걸 너무 오랜만에 해봐서 내가 볼썽사납고 너무 불쌍했다. 그래서 폭신하고 햇살 냄새가 나는 이불을 가득 끌어안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잠들자, 잠들어야지. 어서 아침이 오길 기다리는 거야. 차갑고 추운 새벽바람이 지나가고 한결 따뜻하고 맑은 아침공기가 방 안에 스며들면 새벽의 검푸른 빛이 점점 푸르게 변하다가 짙은 하늘색이 되었다가 갑자기 붉은 빛으로 변하고…, 그렇게 점점 노랗게 변해가다가 온 세상이 하얗게 제 색깔을 되찾을 것이다. 아침이 온다.
드르륵.
“쿠가씨, 일어나셨나요?”
“예, 안녕히 주무셨나요. 다카하시씨.”
이제 거의 새벽이 다 되어서 다카하시씨가 깨우러 오셨지만 먼저 일어나 있었다. 이제 시즈루를 만나러 간다. 시즈루를 만나면 어떨지…, 상상이 안 된다.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예의지요, 용건은 누구나 있지만 여유는 누구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예….”
아까 일어나서 방 밖으로 나오니 뭔가 좋은 냄새가 솔솔 났었다. 그건 절로 배가 고파지는 맛있는 음식 냄새-…, 약간 간장 같은 게 들어간 것 같은, 짭짤하고 따뜻해서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런 냄새.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절로 부엌 쪽으로 다가가니 한창 열중이셨던 다카하시씨가 날 보더니 아직 준비가 안 되었으니 옷 갈아입으러 가라고 부엌으로 못 들어오게 하셨었다. 그래서 뭔가 가슴이 간지럽고 머쓱한 기분으로 다시 방으로 돌아왔었는데 그건-…, 대체 무슨 기분이었을까. 설명하기 어려운... 쑥스러우면서도 머쓱한데-, 기분은 좋은 그 야릿한 기분은 뭘까. 아주 살짝, 조급한 기분으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한 뒤 다시 부엌으로 갔더니 그 좋은 냄새는 거의 사라지고 다카하시씨 손에는 직사각형의 상자가 보자기에 묶여 들려 있었다.
“뭔가요?”
“후후, 비장의 무기요.”
“음식이?”
“네~.”
오전 6시 10분. 다카하시씨의 집을 나서니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아 온 세상이 파랗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일어난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 밤을 새지 않으면 경험할 수 있는 이 새벽의 분위기,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다. 길가에 사람도 없고 이렇게나 조용한데 다카하시씨는 이런 시간에 남의 집을 방문하신다니,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 알지만-. 역시 이 분 이상하다.
“시즈루는 당신의 어떤 면이 좋은 걸까요?”
“예?”
갑작스런 공격인 걸까? 아님 그냥 하는 말씀??
“시즈루는 말이지요? 어릴 적부터 참 예쁜 것을 좋아했어요. 반짝반짝하고 소녀 같은 것을요. 기모노 입는 것도 좋아했어요. 소매가 나풀거리는 것이 더 좋다고 늘 연분홍색 기모노 한 가지만을 고집하기도 했어요. 근데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얻어내는 경우가 많고 떼를 써서 얻는 일은 전혀 없었지요.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손에 들어올 수 있게 했지요.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간편하다고 생각해서예요.”
…역시 애매하다, 공격인가 아닌가. 틈을 파고드는 능력이 있으시군. 하지만 이런 건 시즈루에게서도 많이 당하는 패턴이야.
“혹시 그 아이는 당신에게도 그러나요? 그리고 그런 면을 잘 받아줘서 시즈루가 당신을 좋아하는 건가요?”
“…아니요, 저에게는 제멋대로로 보일 만큼 억지도 부리고 떼도 씁니다.”
“……. 의외네요, 그 시즈루가.”
“저에겐-…, 그런 모습 밖에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 같이 사는 집도 시즈루가 미리 정하고 나서 저에게 보여줘서 같이 사게 되었고, 식사도 시즈루가 먹고 싶다는 것을 더 많이 먹었지요. 시즈루는 저의 식습관을 잡아주려고 더 의견을 많이 냈었던 거죠. 시즈루는 저에게 원하는 것 혹은 제가 해야 하는 것 등을 그런 식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저도 그게 싫지 않아요.”
응, 귀여웠다. 시즈루가 날 생각해서 하는 행동도 투정도, 자기가 이루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쓰던 떼도 전부. 사실 알고 있으면서 짐짓 모르는 첫 이끌려가는 것도 시즈루의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가 많았고 시즈루의 생각대로 해주고 나면 말해주는 뒤늦은 솔직한 고백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그렇게 말해도 꽤 전의 일이지만. 또렷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다.
․
․
․
․
․
“나츠키….”
“응…?”
“오늘 비가 온대요-.”
“아-…, 싫다. 주말인데.”
“…나츠키-.”
“응…?”
“좀 더 잘까요?”
“아냐, 오늘 쇼핑 가기로 했잖아. 차 정기점검도 가야하고, 오늘 영화도 보기로 했는데-….”
“으응-….”
내가 그 말을 하자 조금 울먹이는 표정으로 잠깐 변했다가 입술이 옆으로 늘어지고 얇아졌다. 뭔가 불만이 있을 때 짓는 표정, 그러더니 시즈루가 내 허리에 손을 넣어 꼬옥 끌어안았다. 뭐지? 뭐가 문제지? 쇼핑이 가기 싫은 걸까? 나가기 싫어? 물어볼까? 아냐, 물어보면 또 아니라고 할 거야. 그럼…, 떼 쓰는 걸 기다려볼까.
“오늘 아니면 못 가니까 어서 준비하자, 시즈루.”
“…!”
아아, 시즈루. 당황하면서도 서운한 얼굴,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아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점점 더 내 품으로 파고드는 행동으로 떼를 쓸 준비를 한다. 자, 어서. 뭘 원하는 지 말해봐.
“나츠키이-….”
“음…? 왜?”
“…나츠키…….”
점점 시즈루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이고 눈 꼬리가 처진다. 뭔가 말하려는 입술은 조금 열렸다가 망설이며 다시 닫혔다가, 우물우물. 아…, 귀여워. 좀 더, 떼 써줘. 입으로 직접 말을 해, 네가 원하는 걸 말해줘.
“으으응~…!!”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 화난 것처럼 인상을 쓴다. 답답해 죽겠다는 것처럼 손을 폈다 오므렸다 다리를 작게 털거나 베개를 꾹 잡는다. 뭐가 그렇게 말하고 싶어 죽겠는데? 말을 해야 알지-.
“시즈루, 나 먼저 씻으러 가? 좀 더 잘래? 깨워줄게.”
“…~~~나츠키!!!”
시즈루가 결국 못 참고 내 허리에 있던 시즈루의 팔을 풀고 일어나던 나를 침대로 밀쳤다. 그리고 나를 침대에 좀 거칠게 눕히고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서 꽈악 끌어안아버렸다. 그래서 베개에 자기 얼굴이 묻힐 정도로 날 깊이 끌어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갑자기 내 귓가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 설마 내가 너무 장난이 심했나. 그래서 갑자기 든 죄책감에 놀라 시즈루를 살짝 밀어내서 얼굴을 봤더니-, 내가 불현 듯 떠오른 나쁜 의미로 삐진 얼굴이 아니어서 속으로 굉장히 안도했다. 시즈루는 삐지다가 화가 나면 감당이 안 되니까. 하지만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표정이다. 불그레해진 볼과 불편한 듯 패인 눈썹 사이의 주름, 물기가 그렁그렁한 눈동자. 그런 의미였나 싶어서 살짝 미소 지으며 시즈루를 끌어당겨 입 맞춰줬다. 그리고 내 볼에 손을 대고 허리를 더욱 당겨 안는 시즈루의 허리를 쓸어내려가다가 엉덩이 쪽으로 손을 옮겼다. 실크로 된 매끈매끈한 캐미솔이 기분 좋아, 부드러워. 그렇게 점점 더 시즈루의 귀여운 엉덩이 쪽으로 손을 내리면서 시즈루가 원하는 것보다 더 깊은 입맞춤을 느끼고 있는데...뭔가 위화감이 들어서 살짝 눈을 떠보니 시즈루가 인상을 쓰더니 내 손을 잡아채서 내 머리 위로 들어 베개의 지그시 눌러버렸다.
“으응~…, 안돼요. 나츠키, 가만히.”
“왜 안 돼.”
“내가 갖고 싶은 거라구요.”
이런…, 이제 이렇게 되면 시즈루는 더 이상 떼를 쓰지 않는 것이다. 내가 시즈루가 원하는 걸 해주게 되었으니까, 내가 정확히는 아니어도 시즈루의 기분과 마음을 알아차리고 응할 마음이 있다는 걸 시즈루가 알게 되었으니. 그러면 시즈루가 더는 떼 쓸 필요가 없으니까. 그저 원했던 걸 마음껏 만끽하면 되는 것이다. …그게 내가 아는 시즈루.....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에게 알아차려달라고 떼를 쓰기는커녕 한 마다, 혹은 그 어떤 실마리조차도 없었다.
“쿠가씨?”
“예!”
“아이 참-, 다 왔어요?”
“아, 예. 제가 잠깐 생각을 좀….”
“아라~, 아직 잠이 다 안 깬 건 아니고요?”
“아, 아닙니다.”
“여유가 넘치는 군요.”
“죄송합니다...”
이런, 생각이 너무 깊었다. 어느새 시즈루의 집에 도착해 다카하시씨가 시즈루네 집의 초인종을 한 번 누르시고 나서 싱글싱글하는 좋은 표정으로 누군가 나오길 기다리셨다. 양손에는 아침에 갖고 나오신 그 상자가 들려있는데 여기까지 오실 때에는 보자기에 묶어서 한 손에 들고 오시다가 시즈루의 집에 도착하시자 귀한 선물인 것처럼 두 손에 다소곳이 들고 계신다. 마치 선물이에요~! 하면서 받는 사람 품에 안겨줄 것처럼.
“이거라면 후지노가의 안방에도 능히 들어갈 수 있지요~.”
“궁금하네요.”
“여기서 보여주기 힘드니까 들어가서 풀어봅시다~.”
“예-….”
덜컹!!
문이 활짝 열리고,
“다카하시씨, 미안합니다만 오늘은,”
누가 왔는지 안 봐도 아시는 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시즈루의 아버지의 굳센 의지, 허나 실례가 안 되는 말투가 연타,
“좋은 아침입니다, 후지노씨. 아침에 결례이지만 좋으시다면 ‘이것’들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걸 받아주지도 않고 대화 절단 후 다카하시씨의 자기 용건 들이밀기,
“윽…!...그건…....들어오시오.”
갑자기 상자를 보고 놀란 시즈루의 아버지가 다카하시씨가 미소를 지으며 내미는 상자를 홀린 사람처럼 받아들며 허어-…, 라고 감탄을 하시더니 묵직하게 인상 쓰신 얼굴이 확 풀어지신다. 1분도 안 걸렸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간단하게였다. 대체 뭐야?! 난 무엇 때문에 이리도 긴장을 했나?!! 이럴 거면 어제 들여보내주지??! 사람을 가지고 장난하는 건가!! 시즈루의 아버지는 다카하시씨에게서 받은 상자 꾸러미를 다카하시씨가 하셨던 것처럼 엄청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받쳐 드시더니 앞장서서 대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시고 다카하시씨는 그런 시즈루의 아버지를 보고 키득 거리며 웃다가 나더러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 하셨다. 따라 들어가는 내내 앞에서 둘이 시시덕거리시며 뭐 이런 귀한 걸 다 갖고 왔냐고 시즈루도 무척이나 좋아할 거라는 내용의 대화를 하고…, 아직 아침 들지 않았으면 같이 해야겠다고 또 좋아하신다. 아놔, 대체 저게 뭐기에? 저 안에 무슨 산해진미라도 있는 것인가?
“하하, 이거라면 시즈루도 나올 수밖에 없을 거요.”
“시즈루는 자기 방에 있나요?”
“잘 모르겠지만 틀어 박혀서 책만 읽고 있는 것 같은데, 산책도 통 하지 않고…, 간만에 왔으면서 이 애비 랑도 안 놀아주고 있소. 뭔가, 일이 있었겠지.”
시즈루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시면서 나를 알싸한 눈초리로 지그시 보신다. 역시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대체 이 누명은 어떻게 시작을 한 것인가. …미치겠다.
“시즈루에게는 쿠가씨가 왔다고 하지 말고 저만 얘기해서 나오게 해보세요.”
“그 방법이 좋긴 하겠지만-…, 에잉, 시즈루에게 미움 받고 싶진 않네.”
“어찌 됐건 두 사람 일이니까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해결을 해야지요, 이렇게 평생 피할 셈이란 말입니까?”
“허나 그건 좀 치사하잖소?”
“치사하거나 말거나 누가 그런 걸 신경 쓴대요.”
“허, 참! 시즈루의 마음도 좀 헤아려보시오!”
“그리 되면 세월이 천 년, 만 년 가겠습니다!”
이 분들, 시즈루가 어릴 때부터라고 해도 무진장 죽이 잘 맞는 죽마고우 같이 친하시다….
“알겠소! 그럼 그, 저 상자 안에 있는 거나 한 개 내주시오. 내 시즈루에게 갖다 줄 테니.”
“예, 그러십시오~. 그럼 부엌에 가서 작은 그릇에 담아줄 테니 가져가세요.”
“알겠소. 그럼 아가씨는 잠시 여기 계시오, 금방 다녀올 테니.”
“아, 예. 알겠습니다.”
“…이 방에 계시오.”
그러시더니 시즈루를 낚을 준비를 하기 위해 두 분이서 앞 다투어 티격태격하시며 방을 나가셨다. 무안하게 나 홀로 남의 집 안방에. 허…, 그런데 음식으로 시즈루를 낚는다라. 식탐이 별로 없는 시즈루가 이끌려 나올만한 게 뭐가 있을까? 평소에 숙주랑 파, 닭고기를 볶은 요리를 좋아해서 자주 해먹기는 했었지만 그것도 단지 볶은 파의 단 맛이 좋아서 자주 요리한다는 그런 뻔한 이야기. 시즈루는 약간 매콤한 요리를 좋아하고 야채의 물기가 많은 요리도 좋아한다. 그리고 생선보다는 육류를 더 좋아하고 미각이 좋아서 음식도 맛깔나게 잘 한다. 난 남이 만들어주는 음식을 좋아해서 점심은 무조건 외식이지만 시즈루는 여유가 있을 때 도시락을 만드는,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건 만들어 먹고 해 먹을 수 있는 건 해 먹자는 주의. 그런 시즈루가 냄새를 맡고 맛을 보면 자기 고집을 꺾고 방 밖을 나오게 된다니, 상상이 안 된다.
결국…. 나는 여기까지 왔지만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그저 저 두 분이 시즈루를 데리고 나오시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 분들은 내가 모르는 시즈루를 알고 계시겠지. 시즈루가 살던 이 집에서 시즈루와 함께 사신 분들, 이게 시즈루네 가족의 형태인 건가. 예전에 단 한번, 시즈루가 얘기해준 적 있는 어머니는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셨다며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그럼 다카하시씨는 시즈루를 가르치시면서 시즈루에게 어머니 역할을 해주신 분이시겠지. 그렇다면 시즈루가 나올 만하겠다. 누구나-…, 어릴 때부터 먹어온 추억의 요리 같은 게 있다고 하니까. 그런 게……, 있다고 하니까.




최근 덧글